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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생은 운명결정인가? 자유의지인가? 김만태교수 사주 작명
2025.06.09 16:43
작성자 : 김만태교수    메일 : ware4u@hanmail.net 조회 : 260  

인생은 운명결정인가? 자유의지인가?
본 내용의 원문은 김만태 교수님의 KCI 학술논문,「사주와 운명론, 그리고 과학의 관계」(원불교사상과 종교문화 제55집, 2013년 3월)에 수록되어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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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생은 운명결정인가? 자유의지인가?

운명 담론의 현실적 표출과 운명 함수

운명에 관한 두 갈래 담론은 오늘날 한국 사람들의 운명 인식에서도 잘 나타나고 있다. 한국갤럽의 조사(1994, 1996, 2010)에서 대상자의 55에서 62%가 ‘운명은 노력으로 만들어지는 것’이라고 응답하여 과반수의 한국 사람들은 운명결정론보다는 자유의지론에 인식의 무게를 더 싣고 있다. 그러나 "자신이 열심히 노력하면 성공할 수 있는가?'라는 또다른 질문에 대해서는 그렇지 않다는 부정적 견해가 53.5%를 차지하였다. 즉 한국인은 관념적으로는 자유의지론을 선호하지만 정작 현실적으로는 '금수저, 흙수저' 등 운명(환경)결정론에 당면하고 있다.

한국인의 행복 추구와 운명 인식에서 이처럼 이중적 행태가 나타나는 배경에는 한국사회가 급격한 변화를 겪으면서 양산해 온 기회주의, 한탕주의, 부정부패, 연고(緣故)주의 등 사회 건강성을 해치는 요인들이 오랫동안 작용한 탓이 크다. 이에 따라 누구나 열심히 노력하면 그에 상응한 좋은 결과가 있으리라는 비례공식이 무너졌으며, 원칙 고수와 정당한 절차로는 한국사회에서 좀처럼 성공할 수 없다는 인식이 사회 전반에 확산되었고 사람들의 뇌리 속에 각인되었다.

이른바 한국사회 운영의 정당한 원칙과 일관성, 공정성 부재가 한국인의 운명관, 행복관에서 모순과 이중성이 나타나는 주요한 원인이라고 볼 수 있다. 이는 사회적 동물로서 인간 개개인의 운명관은 고립적으로 형성되는 것이 결코 아니라 그가 소속된 집단의 정치적, 사회적 상황 요인 등과 직결되어 있음을 잘 말해준다.

두 갈래의 운명 담론을 논리적으로 분석해보면, 인생은 운명결정론이나 자유의지론, 어느 한쪽에만 전적으로 매이는 것이 결코 아님을 알 수 있다.

예를 들어 어떤 사람이 아프다고 했을 때 결국 병이 낫거나 낫지 않을 것이기 때문에 의사나 약을 찾을 필요가 없다고 추론하자. 이는 운명결정론, 숙명론으로서 어떤 경우에도 치료를 위해 의사나 약을 찾을 필요가 없다. 왜냐하면 결국에는 병이 낫거나 낫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것은 그 사람의 쾌차 여부가 의사나 약을 구해 찾느냐 찾지 않느냐 하는 사람의 행위나 의지 여하에 좌우된다는 사실을 간과한 것이다.

하지만 의사나 약을 구한다고해서 언제나 반드시 구할 수 있는 것도 아니며, 의사나 약을 찾았다고 해서 언제나 그 병이 반드시 낫는 것도 아니다. 그리고 사람마다 그 병이 낫는 정도에도 타고난 기본적 차이가 있다. 이런 타고난 기본적 차이를 현대 과학에서는 유전자(遺傳子, gene)로 설명한다.

심각하지 않은 사소한 병으로 진료를 받다가 의료 과실로 죽음에까지 이르거나, 예기치 못한 돌발요인으로 말미암아 사망하는 경우도 흔히 있다. 이 경우 당사자를 죽음에 이르게 한 요인은 유전자도, 자기 의지도 결코 아니며, 어쩔 수 없이 맞닥뜨린 ‘운명의 굴레’라고 밖에는 설명할 수 없을 것이다.

지금까지 운명론적 신앙과 운명개척 의지에 관한 담론들은 대부분 극단적으로 치우쳐 자신의 견해를 피력하거나 상대의 의견을 비판하였다. 앞의 예로 말하자면 병에 걸리고 쾌차하는 것이 전적으로 운명에 달렸다거나 순전히 자신의 의지로 치료 가능하다는 식이었다. 하지만 현실적으로는 타당성이 거의 없다.

사람의 신체 건강이 자신의 의지와 무관한 유전자 요인에 의해 상당하게 결정되듯이, 무병장수, 부귀, 육친(六親) 등을 포함하는 사람의 장래 운명도 자신의 의지와 무관한 또 다른 선천적 요인, ‘운명아(運命我)’에 의해 상당히 결정될 가능성이 있다는 사실을 결코 배제할 수 없는 것이다.

이러한 운명아의 가능성을 추론하는 것이 사주명리(四柱命理)이다. 사주명리에서는 사람을 소우주(小宇宙, Microcosm)로 가정하면서 사람은 잉태되는 순간부터 우주의 기운과 영향을 주고받는다고 본다. 그 결과 사람마다의 독특한 우주적 시간과 공간의 결정부호인 사주(四柱)가 나오는 것이다.

인생의 향방이나 길흉은 개인의 노력이나 의지, 타고난 사주(팔자) 등 소수의 한정 요인에만 영향을 받아 결정되는 것이 결코 아니다. 인간사는 매우 복합적이고 다단하므로 운명결정이냐 자유의지냐의 이분법적 흑백논리로 그 해답을 쉽게 찾을 수 있는 단순한 것이 절대 아니기 때문이다. 그래서 “삶이 진정으로 의미 있을 때는 그것이 미지수(未知數)였을 때이다. 완결되지 않아서 미래로 열려 있을 때 인생은 무엇으로든 변화할 수 있는 어떤 것으로 절실히 다가온다.”라고 말하는 것이다.

인생 진로에 영향을 미치는 요인은 수없이 많다. 사주명리는 그것들 중의 하나로서, 사람이 태어난 때의 음양오행의 기운이 그 사람의 운명에 주요하게 작용한다는 경험적 사실을 학술적으로 체계화하기 위해, 그 기운을 천간 지지의 부호로 바꾼 사주를 통해 체계적으로 해석하는 것이다.

따라서 인생의 향방과 길흉 등 인생 진로를 굳이 함수로 표현해보자면 <그림>과 같이 나타낼 수 있다.


cd1295c7bf19b199538c98491e209a38_사주명리의 운명함수.png


사주명리의 관점에서 삶의 타고난 모습인 운명을 함수로 나타낸다면 생년월일시, 이른바 사주팔자(T)를 가장 주요변수로 취급한다. 그 외 개인의 의지와 노력(w), 유전자(g), 부모의 환경(p), 그 사람이 종사하는 직업(o), 이름이라는 성명학적 요소(n), 배우자와의 궁합(m1), 전공 공부(m2), 그 사람의 양택과 조상의 음택인 풍수환경(f1), 외모인 관상(f2), 좋은 날을 가려서 행사하는 택일(c1), 우연히 마주치는 요소(c2), 학교, 직장, 조직 등에서 동료, 상하의 인간관계 등 기타 요인(x) 등도 상당한 영향을 미치는 변수임에는 틀림없지만 사주명리의 운명함수에서는 일정한 값을 갖는 상수로 가정한다.

이처럼 많은 변수를 값이 변하지 않는 상수로 취급하다 보니 사주명리의 운명함수에서는 사주와 인생 진로 간에 명확한 인과 관계를 제시하지 못하는 경우가 있을 수밖에 없다. 그런즉 사주는 믿을 게 못되고 비합리적인 것이라고 인식되는 경우가 많다.

그래서 중요한 사실은 이런 운명함수 요인들이 개개인의 미래 운명에 대해 절대적 필연성(必然性)이 아니라 확률적 개연성(蓋然性)만을 담보한다는 점이다. 예를 들어 어떤 사람이 타고난 사주가 대운(大運)과 더불어 중화(中和)를 이루면 그의 인생 진로는 좋을 가능성이 매우 높지만 언제나 반드시 높지는 않다.

인간의 삶은 피사의 사탑(斜塔)에서 같은 궤적을 그리며 떨어지는 쇠구슬이 결코 아니다. 그러므로 운명함수의 제반 조건들이 아무리 동일할지라도 시간과 공간이란 두 축 안에서 인간이란 유기적(有機的) 존재가 만나서 그려내는 인생의 궤적은 결코 동일할 수가 없다. 사주명리의 운명함수는 외부 요인과 상호 작용하는 열린계(open system)이지 고립된 닫힌계(closed system)가 단연 아니다. 그렇기 때문에 인간이 더더욱 인간다울 수가 있으며 자아(自我)를 발견해나가는 수고가 오히려 설렘으로 다가올 수 있는 것이다.


현대 과학과 확률적 가능성

개기일식 현상을 하늘의 징벌이라고 두려워하던 전근대 사회에서 누군가 일식(日蝕)이 일어날 날짜를 미리 알았다면 사람들로부터 많은 존경과 추앙을 받았을 것이다. 한반도에서 다음번 개기일식은 2035년 9월2일 오전 9시40분과 2041년 10월25일 오전 9시에 각각 관측될 것이라는 사실은 정확히 예측할 수 있다. 이렇게 과학은 앞으로 예정된 일을 미리 알게 하는 기능, 즉 예측성을 가지고 있는데 이것이 바로 과학의 본질이고 과학 지식의 힘이다.

그런데 세상에는 행성의 움직임처럼 비교적 규칙적이어서 예측될 수 있는 현상들도 있지만 그렇지 않은 현상들도 많다. 즉 30년 후 한반도에서 바라보는 행성의 움직임은 미리 알 수 있지만 1주일 후 한반도 날씨가 어떨지는 아무리 슈퍼컴퓨터를 동원해 계산해도 정확히 알 수 없다.

피사의 사탑에서 떨어지는 쇠구슬의 궤적은 정확히 예측할 수 있지만 굴뚝에서 피어오르는 연기 입자의 궤적은 예측이 매우 난해하다. 운동장에서 야구 선수가 친 야구공의 궤적은 미리 알 수 있지만 운동장에서 뛰어노는 어린아이의 움직임은 단지 확률적으로만 예측할 수가 있다. 이것이 그동안 절대적으로 신봉되었던 근대 과학의 현실적 한계이다.

일상생활의 뜻하지 않은 사건, 매일매일 주식 시세의 변동 등도 역시 보통의 사람으로서는 예측이 불가능하다. 우리 인간의 삶은 어느 쪽에 더 가까울까? 우리네 삶은 질량과 중력 등 몇 가지 요인만으로도 그 움직임을 미리 알 수 있는 쇠구슬이나 야구공이 결코 아니다. 유기적으로 움직이는 인간사는 수많은 요인이 얽히고설켜서 만들어지는 비선형계(非線型界)이자 복잡계(複雜界)이다.

과학이 정확한 예측성을 그 본질로 한다면 이렇게 예측할 수 없는 현상들은 과학으로 다룰 수 있는 영역에서 완전히 제외되는 것일까? 그렇지는 않다. 확률로써 다룰 수 있는 것이다. 행성의 움직임처럼 정확한 예측이 가능한 규칙적 현상뿐 아니라 기후의 잦은 변화와 같은 확률적 예측만 가능한 무작위적 현상까지도 현대 과학은 모두 다루고 있다. 이를 카오스(chaos) 이론이라 한다.

현대 물리학에서 극대 세계(우주)를 다루는 상대성이론과 극미 세계(소립자)를 다루는 양자론을 통합하는 이론으로 현재 가장 설득력이 있는 ‘초끈이론’에서는 모든 물질의 가장 근본적인 구성단위가 1차원적의 가느다란 ‘끈(string)’이라고 가정한다.

초끈이론을 사주명리에 응용할 수도 있다. 개인이란 운명 주체는 수많은 인연(因緣)이란 끈(string)으로 연결되어 있다. 끈은 생년월일시의 근묘화실론(根苗花實論)과 아비식재관인(我比食財官印)의 육신론(六神論)으로 설명될 수 있다. 생년월일시의 근묘화실과 아비식재관인의 육신은 고립되어 하나로만 존재하는 것으로 그치는 것이 아니라 무수한 인간관계 속에서 서로 연결되어 존재하고 있다.

운명의 주체는 결코 고립되어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무수히 많은 연결 끈으로 이어져 상호 영향을 미치며 존재하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끈들이 끊임없이 움직이면서 인생의 다양한 모습들을 만들어 간다. 그러나 그 모습은 정지해 있는 것이 아니고, 결정론적이지도 않으며 단지 어떤 특정한 위치에 존재할 양자적(量子的) 확률만 알 수 있다.

어떤 사건이 그리 될 수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달리 되었을 경우에 그 사건을 우연성(偶然性, contingency)이라고 한다. 필연성(必然性, necessity)은 주어진 조건 아래서 일의적(一義的)으로 명확하게 규정되어 어떤 식으로든 그와 다를 수 없음을 말한다. 필연이 '반드시 그러한 것'을 의미하는 데 대해 우연은 '예기치 않게 일어나는 것'을 가리킨다.

기계론적 관점에서 우연은 원인을 알 수 없는 것이다. 그러나 우연은 원인을 알 수 없는 것이거나 원인이 없는 것이 아니며, 어떤 인과관계가 자신에게서 생기지 않은 것이다. 인과 관계의 보편성은 우연성에도 적용된다. 즉 우연적 사건도 반드시 원인을 갖는다.

필연성은 인과성(因果性, causality)과 동일하지 않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원인은 필연적으로 결과를 산출한다. 그래서 모든 인과적 연관은 원인과 결과 사이의 필연적 연관이다. 그러나 모든 필연적 연관이 반드시 인과적 연관인 것은 아니다.

예를 들면 낮에 이어 필연적으로 밤이 뒤따르긴 하지만 낮이 밤의 원인이어서 그런 것은 아니다. 지구의 자전이 낮과 밤의 변화 원인이다. 우연과 필연은 서로 분리된 채 절대적으로 대립하는 것이 아니라 변증법적 연관 속에서 존재한다. 따라서 어떤 연관에서는 필연적인 사건이 다른 연관에서는 우연적일 수 있으며 또 그 반대도 가능하다. 그리고 필연성을 절대화하면 숙명론(宿命論)으로 빠지고, 우연성을 절대화하면 비결정론(非決定論)으로 빠지게 되므로 경계해야 한다.

사람은 태어나는 순간부터 언젠가 필연적으로 죽는다. 그러나 태어남이 죽음의 원인은 아니다. 사람이 태어나는 순간 아무리 좋은 사주팔자를 갖더라도 필연적으로 잘 살지는 않는다. 좋은 사주팔자와 행복한 삶의 연관 관계가 필연적이지는 않다는 뜻이다. 그러나 좋은 사주팔자는 행복한 삶을 실현하는 주요 원인들 중의 하나이다. 단지 우연성의 양적 척도인 개연성, 가능성만을 지닐 뿐이다.

인생함수처럼 타고난 사주를 비롯해 수많은 원인이 행복한 삶의 여부라는 결과를 산출하는 경우에는 사주와 인생진로 간에 필연성과 인과성을 쉽게 단정하기란 쉽지 않다. 이는 좋은 사주가 행복한 삶의 주요 원인이 아니어서가 아니라 표면적으로 순전히 우연적인 현상처럼 작용하기 때문에 필연성을 명확하게 논증하기가 쉽지 않은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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