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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주,사주팔자는 운명인가? 과학인가?
2025.06.09 16:17
작성자 : 김만태교수    메일 : ware4u@hanmail.net 조회 : 4,559  

사주,사주팔자는 운명인가? 과학인가?
본 내용의 원문은 김만태 교수님의 KCI 학술논문,「사주와 운명론, 그리고 과학의 관계」(원불교사상과 종교문화 제55집, 2013년 3월)에 수록되어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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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주와 운명론, 그리고 과학의 관계

〈요약문〉

한국인에게 있어 사주(四柱)내지 사주팔자(四柱八字)는 수긍하고 살아가야만 하는 운명의 틀이자 극복하고 이겨나가야 할 양가감정적(兩價感情的) 존재이다. 사주명리(四柱命理)는 한국인의 삶 속에 깊숙이 자리하고 있으며 한국인의 운명관에 미치는 영향이 지대하다. 그러나 지금까지 사주명리에 대해 학문적, 공식적으로 제대로 된 담론이 없었다.

한국사회에서 사주와 운명에 관한 담론은 ‘운명-의지’와 ‘미신-과학’의 두 측면에서 진행되어 왔다. 운명 담론을 분석해보면 인생은 운명결정론이나 자유의지론, 어느 한쪽에만 전적으로 매이는 것이 결코 아님을 알 수 있다. 인간의 운명은 선천적 요인이나 자유의지에 따른 필연적 결정이 아니라 씨줄이라는 운명아(運命我)와 날줄이라는 의지아(意志我)의 상보(相補) 작용에 의해 상대적, 확률적, 가능적, 개연적 결정으로 만들어지는 것이다. 운명에 관한 담론을 이렇게 이해하는 것이 보다 인간적, 현실적이다.

현대 과학에서 물질에 대한 새로운 이해는 이제 더 이상 과학 진리를 필연적, 절대적 위치에 두지 않는다. 따라서 이제는 우연, 모호, 개연 등의 요소도 과학의 영역 안으로 수용된다. 인생은 피사의 사탑에서 같은 궤적을 그리며 떨어지는 쇠구슬이 결코 아니다. 아무리 운명함수(運命函數)의 모든 조건이 같을지라도 인간이란 유기적 존재가 그려내는 인생의 궤적은 결코 같을 수가 없다. 그러므로 사주명리를 미신이냐 과학이냐의 단순논리로 접근하기 보다는 삶에 대한 또 다른 의지의 표현으로 여기는 것이 동물이 아닌 인간으로서의 사람에 대한 이해를 보다 풍부하게 한다.


주제어: #사주 #사주명리 #명리학 #운명론 #운명함수 #자유의지 #사주팔자


Ⅰ. 머리말

Ⅱ. 사주와 운명에 관한 두 가지 담론

Ⅲ. 운명 담론의 현실적 표출과 운명 함수

Ⅳ. 현대 과학과 확률적 가능성

Ⅴ. 사주명리와 과학의 관계

Ⅵ. 맺음말




시작하며

한국인의 사유체계와 한국사회의 기층문화를 형성하는 요소들은 매우 많다. 그중에서도 ‘사주(四柱)’내지 ‘사주팔자(四柱八字)’는 한국인의 운명을 읽는 부호로서 오랫동안 자리매김해오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회적 시간이 흐를수록 오히려 삶의 불확실성이 더욱더 가중되고 있는 현대 한국사회에서 사주, 사주팔자만큼 극명하게 상반된 가치 평가를 받고 있는 문화요소도 없다.

우리가 흔히 사용하는 속담 중에 “사주(팔자)에 없는 관(冠)을 쓰면 이마가 벗어진다.”는 말은 과욕(過慾)을 버리고 자신의 타고난 분수(分數)대로 사는 것이 신상에 좋다는 의미인데, 여기서 사주(팔자)는 사람에게 이미 주어진 운명을 지칭하는 용어이다. 이처럼 사람이 태어난 연월일시를 간지(干支) 여덟 자로 각각 매긴 사주, 사주팔자는 오래전부터 한국사회에서 운명론의 대명사로 존재해오고 있다.

그뿐만 아니라 사주(팔자)는 운명예측 행위의 가장 중요한 수단으로도 활용되어오고 있다. 이에 따라 한편에서는 사주(팔자)를 통해서 끊임없이 운명예측 재화를 소비하고 있으면서, 또 다른 한편에서는 이런 운명론과 운명예측 행위를 현대 과학사회에는 도저히 어울리지 않는 미신, 보다 완화해서 표현하면 비합리적, 패배적인 저급행위로 치부하고 있다. 개인 실용적 측면과 사회 교육적 측면에서 사주, 사주팔자는 매우 상반된 평가를 받고 있다.

사주, 사주팔자를 키워드로 하는 운명예측 소비행위의 단면은 인터넷, 언론, 방송 등 각종 매스 미디어에서 끊임없이 대중에게 노출되고 있는 다양한 사주관련 콘텐츠들의 물량 공세가 갈수록 거세지고 있는 점에서도 쉽게 찾을 수가 있다. 포털 사이트에서 ‘사주’, ‘운세’ 등 유관 단어로 검색을 해보면 관련 인터넷 카페, 블로그, 사이트, 광고, 질문, 게시판 자료들이 대량으로 쏟아져 나오고 있다. 이들은 게걸스런 물신(物神)으로 변해 사람들로 하여금 끊임없이 운명예측 재화의 반복 소비를 강요하고 있으며, 소비자들은 이런 소비행위를 통해 일시적이나마 심리적 위안을 얻고 있다.

그러나 운명예측 재화의 공급자와 수요자 양측 모두 소비의 재(再)확대에만 급급하다보니 정작 중요한, 그 바탕에 존재하는 사주와 운명에 관한 인식 관계, 사주명리(四柱命理)의 근본 논리와 사유 체계 등에 관해서는 별로 관심을 기울이지 않고 있다. 이런 사정은 기존 학계에서도 크게 다르지 않아 사주와 사주명리의 실체에 대해 진지하게 고민하는 경우는 매우 드물다. 지금처럼 접점 없이 한편에서는 사주명리를 숙명론적 미신으로 치부하고 정반대편에서는 과학 내지 통계과학이라고 옹호하는 한, 많은 한국 사람이 인생의 어느 순간 한번쯤 심각하게 고민해보는 사주와 사주명리의 면모를 온전히 파악해볼 수 있는 기회를 놓쳐 버리게 된다고 논자는 생각한다.

이에 따라 동북아시아 사람들과 긴 시간동안 함께 해온 술수 문화이자 지금 이 순간에도 널리 행해지고 있는, 사주, 사주팔자를 중심으로 한 운명예측 문화를 ‘미신―과학’과 ‘운명―자유의지’의 두 가지 스펙트럼 속에서 고찰해봄으로써 현대 한국사회에서 성행하는 운명문화에 대한 인식의 지평을 좀 더 넓히는 데 도움이 되고자 한다.


사주와 운명에 관한 두 가지 담론

근본적으로 인간 삶의 조건은 불완전하고 결핍하다. 이런 세상 속에서 인간은 자신의 운명에 대해 고뇌하며 운명 인식을 싹 틔우게 된다. 그래서 동서양을 막론하고 일찍부터 운명은 형이상화 되어 종교와 철학의 주제가 되어 왔다. 지금까지 한국사회 전반에서 양산된 사주와 운명에 관한 담론은 크게 두 가지 양상을 띠고 있다. 하나는 ‘운명-의지’이며, 다른 하나는 ‘미신-과학’이다. 이는 비단 한국사회에서만 국한된 논쟁거리가 아니다.

먼저 ‘운명-의지’ 명제는 쉽게 말해 “운명이 사람의 주인이냐, 사람이 운명의 주인이냐”에 관한 논의이다. 운명이란 인간 자신이 아니라 신(神), 인격적 하늘(天)에 의해 부여되는 것이란 관점에서 본다면 ‘운명-의지’ 명제는 종교가 철학과 과학으로 갈라지는 분기점이 된다. 신이 인간사를 좌우한다고 믿는 지점에서 인간 이성의 합리적 결과를 믿는 지점으로 나아가면서 ‘(운명)종교-철학-과학(의지)’의 도식이 펼쳐진다.

운명론적 입장을 견지하는 경우라도 대개 동양의 운명론은 궁극적으로는 숙명론(宿命論)이 되기를 거부한다. 말하자면 운명이란 신(하늘)으로부터 주어지는 것이긴 해도 가변성의 여지는 있는 것이어서 운명 그 자체를 어쩔 수 없이 순응하며 살아가야 하는 숙명으로는 좀처럼 여기지 않는다. 사주명리도 주어진 숙명론을 거부하는 운명 추론 체계이다.

명대(明代)의 사주명리서 <삼명통회(三命通會)>에서도 사람 명(命)의 길흉화복은 태어나는 처음에 부여받는 기(氣)의 청탁(淸濁)에 의해 좌우됨에도 불구하고 “사람이 수신(修身)하고 그 뜻을 정하여 노력하면 하늘로부터 정해진 운명도 이길 수 있다[人定勝天].”라고 천명한다. 이른바 선천적으로 품부한 중화(中和)의 기운 외에 후천적으로 기울이는 수신과 적선(積善)의 노력에 의해서도 사람의 빈부귀천, 요수화복(夭壽禍福)이 분명히 달라질 수 있다고 말한다.

중국 진(晉)나라 곽박(郭璞)의 저술로 알려진 풍수지리서 <금낭경(錦囊經)>의 “신(神)이 할 바를 빼앗아 천명을 바꾼다[奪神功 改天命].”라는 말도 주어진 운명을 순순히 수용하기보다는 적극적으로 변화시키고 개척해나가겠다는 굳은 의지의 표현인 것이다.

이러한 변화 운명론의 관점에서 동양은 결정론적 생각을 거부하는 것이지만 서양은 오히려 결정론적 입장에 치우친 편이다. 기독교에서 인간을 원죄의 존재로 규정하고 개개인의 운명은 전지전능한 신이 주재한다고 믿는 것이나 그리스 신화에 나오는 운명의 세 여신 이야기가 바로 그러하다.

그리스 신화에서 운명의 여신들을 가리키는 모이라이(Moerae)는 각자의 운명, 즉 이 세상에서 각자에게 돌아가는 몫을 의인화한 것이다. 처음부터 각 인간은 자신의 모이라(Moera, 할당하는 것을 의미)를 갖고 있는데, 이는 각자가 받게 되는 생명, 행복, 불행 등의 몫이다. 모이라는 비인격적이고 운명만큼이나 바꿀 수 없는 것으로, 신들조차도 세상의 질서를 위험에 빠뜨리지 않고는 모이라의 법을 범할 수 없다. 그러므로 운명의 여신들은 인간의 삶을 지배하고, 인간이 태어나는 순간에 그 모든 생애를 결정하는 역할을 한다고 믿는다.

중세의 교부철학(敎父哲學)에 따르면, 인류의 조상인 아담에게는 의지의 자유가 있었으나 아담이 자유를 악용하여 신의 뜻을 배반하게 됨으로써 자유를 잃게 되었다. 그리하여 그 후손인 인간은 누구나 나면서부터 원죄(原罪)를 가진 죄인이 되므로 자신의 힘과 의지로는 구원을 받을 수 없고 오직 신의 도움을 통해서만 구원을 받을 수 있다고 여긴다.

하지만 근대 이후 신이나 절대자와의 관계에서 인간성을 보다 적극적으로 실현해나가려는 인본주의적 세계관이 영역을 넓히면서는 인간 스스로 자유의지와 자신의 노력, 결단을 통해 그 운명의 주인공이 될 수 있다는 인식이 보다 큰 힘을 얻어 가고 있다.

‘미신-과학’ 측면은 ‘운명-의지’ 명제에서 파생되었다. 자유의지론이 지배하는 사회에서는 타고난 운명을 추론하는 사주명리가 비과학적, 비이성적 행위로 여겨질 수밖에 없다. 어떤 사실의 원인과 결과 관계가 일관적으로 증명되고 논리적으로 설명된다면 그 사실은 이른바 과학의 영역이 된다. 그런데 인간 삶의 향방은 무수한 변수들 가운데서 이뤄진다. 그렇다 보니 그 많은 변수 중에서 사람이 과거 태어난 때의 사주와 현재 삶의 길흉 간의 인과 관계를 논리적으로 일관되게 증명하고 명쾌하게 설명하기란 결코 쉽지 않다. 그러므로 사주명리는 ‘미신-과학’의 두 영역 중 과연 어디에 속하는가가 뜨거운 논쟁거리가 된다.

최근에는 ‘미신’이라고 모호하게 묶어버리던 영역을 ‘비과학(非科學)-의사과학(擬似科學, pseudoscience)’으로 구분한다. 이 구분에 따르면 침술과 한의학은 의사과학에, 점성술과 사주명리는 비과학에 속한다. 이런 관점은 과학적 방법을 ‘관찰-가설-예측-실험-수정’이라는 다섯 단계로 도식화한 다음 이러한 기준으로써 검증하거나 반증될 수 있는 것만 과학의 명제라는 칼 포퍼(Karl Popper)식 기준을 과학의 요건으로 내세운다. 이 경우 신의 의지를 파악하는 일과 관련이 있으며 운명론적 관점의 산물로 여겨지는 점술은 결함들로 가득 차 있는 개념에 불과하다.

인간은 미리 정해진 운명을 타고나느냐가 ‘운명-의지’에 관한 명제라면, 타고난 운명을 추론하는 체계의 객관적 타당성 여부는 ‘미신(비과학-의사과학)-과학’의 명제에 해당한다. 이른바 팔자소관(八字所關)으로 통칭되는 운명 자체가 없다면 이를 추론하는 사주명리도 존립할 수 없다. 그러므로 ‘미신-과학’ 명제는 ‘운명-의지’ 명제에서 비롯된다. 이 두 명제를 둘러싼 논쟁 관계가 지금까지 운명과 사주명리에 관한 담론을 특징짓는 주요한 두 축이다.

음양의 소식(消息)과 오행의 생극제화(生剋制化)로써 사람의 빈부귀천, 요수화복의 원인을 분석하고 해결의 실마리를 탐색하고자 만들어진 사주명리는 사람은 태어나면서부터 이미 초인간적 존재에 의해 삶의 향방과 대강이 결정된다는 정명론적(定命論的) 인식에 바탕을 둔다. 왜냐하면 현재 이 순간, 미래를 안다는 것은 이미 예정된 미래가 존재한다는 전제가 있어야 가능하다고 보기 때문이다. 그래서 정명론은 일체의 인간사는 미리 정해진 필연적인 법칙에 따라 일어나므로 인간의 의지로는 변경할 수 없다는 의미로 해석된다.

“팔자 도망은 독 안에 들어 있어도 못한다.”라는 속담 표현도 사람의 정해진 운명은 사람 뜻대로 거역하거나 극복할 수 없는 것이라는 정명론적 인식을 함축하고 있다. 이 경우 사람이 살아가면서 맞닥뜨리게 되는 행복, 불행은 자신의 의지와 노력만으로는 감당할 수 없는 문제로 받아들여진다. 그러나 사주명리는 단지 길흉화복의 문제 원인을 찾는데서 그치는 게 아니라 현실적으로 유용한 해답은 무엇인지도 함께 고민해서 제시하는 학문이다.

동서양을 막론하고 오래전부터 “인간에게 정해진 운명은 있는가, 정해진 운명이 있다면 극복할 수 있는가, 사람마다 운명이 다른 것은 무엇 때문인가?”라며 사람들은 끊임없이 고뇌해왔고 종교와 철학뿐 아니라 과학의 화두로까지 대두되었다. 지금까지도 많은 사상가, 종교가가 여전히 논쟁을 이어가고 있다.

인간과 운명에 관한 논쟁은 크게 두 갈래 양상으로 나뉘어 전개되고 있다. 하나는 사람의 힘으로는 어찌할 수 없는 운명이 존재한다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자신의 운명은 자신이 스스로 만들어갈 수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런 논쟁은 쉽게 합일된 결론에 이를 수 없다. 왜냐하면 각 논쟁이 위치하는 관점이 다르기 때문이다. 이를테면 전자는 인생의 한계상황에서 본능적, 직감적으로 깨닫는 인생의 변수(變數)에 관한 것이라면, 후자는 사회교육, 윤리 차원에서 규범으로 여겨지는 인생의 상수(常數)에 관한 것이다.

지혜롭게 생각해본다면, 인간의 삶, 즉 인생이란 이미 예정된 운명의 길을 따라서만 살아가는 것도 아니며, 자기 의지대로 자유롭게 만들어 갈 수 있는 것도 아닌 게 바로 논자가 느끼는 현실이다. 인생이란 수레는 주어진 운명과 자유로운 의지라는 두 바퀴가 하나의 굴대에 끼워져 움직이는 것으로서, 어느 한 바퀴만으로는 수레가 제대로 굴러갈 수 없는 것과 이치가 같다. 그러므로 인생이란 수레를 몰고 가는 주체는 계속적인 자기성찰을 통해 과거를 되돌아보고 현재를 직시하고 미래를 내다보며 자연과 인생의 궁극적 근원과 그 운명에 대하여 끊임없이 질문을 던지고 해답을 구하는 자세가 중요하다고 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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