훈민정음의 제자원리와 역학사상: 음양오행론과 (천지인)삼재론을 중심으로
본 논문은 훈민정음의 창제 배경에 담긴 동양의 역학(易學) 사상, 특히 음양오행론과 (천지인)삼재론을 중심으로 그 제자 원리와 철학적 의의를 고찰한 연구이다. 훈민정음은 인간의 소리에 우주적 이치인 음양오행이 내재되어 있다는 인식 아래, 각 글자의 모양을 발음기관이나 우주의 형상을 본떠 창제되었다.
저자인 김만태 교수는 '모양을 본뜨다(象形)'라는 개념을 단순한 물리적 실물의 모방에 국한하지 않고, 주역의 괘상처럼 추상적이고 형이상학적인 의미까지 시각적으로 형상화한 것으로 확장 해석해야만 훈민정음의 철학적 가치를 온전히 이해할 수 있다고 주장한다.
훈민정음은 자음, 모음, 합자, 성조에 이르기까지 태극, 음양, 오행, 삼재의 원리가 정밀하게 결합되어 있어, 세계 문자사에서 음운적 자질을 시각화함과 동시에 철학적 사유를 내포한 유일무이한 문자로 평가받는다.
I. 머리말
우리 선조들은 한자를 빌려 우리말을 표기하던 이중적 언어생활에서 오는 극심한 불편함을 극복하고자 고유의 문자인 훈민정음을 창제하였다. 언어는 인간의 사유 방식을 규정하는 핵심 도구이므로, 한글의 창제는 우리 민족이 독자적인 인식과 사유의 공동체 기반을 확립했음을 의미한다.
1940년 안동에서 훈민정음 반포 당시의 원본인 '훈민정음 해례본'이 발견되기 전까지는 그 제자 기원에 대해 파스파 문자 모방설, 정초의 기일성문도 모방설 등 구구한 억측이 무성했다. 그러나 해례본의 발견으로 자음(초성)은 발음기관의 상태와 작용을 본뜨고, 모음(중성)은 천지인(天地人) 삼재(三才)를 본떠 만들었다는 '상형설'이 명확한 정설로 자리 잡았다.
그럼에도 현대 학계 일각에서는 훈민정음에 부여된 음양오행과 삼재 사상의 결합을 중세적 세계관에 기반한 비합리적인 견강부회나 관념론적 도식의 억지 결합으로 폄하하며, 한글의 실체 파악에 걸림돌이 된다고 부정하는 견해도 존재한다.
또한 오늘날 역학과 한의학에서 적용하는 순음(입술소리)과 후음(목구멍소리)의 오행 배속이 훈민정음 해례본의 원리와 다르게 나타나는 현상이 있음에도 이에 대한 깊이 있는 연구가 부족했다.
따라서 본 연구는 훈민정음 원본을 중심으로 자음과 모음, 합자에 담긴 역학적 상징성을 재고찰하고, 순음과 후음의 오행 분류적 차이점의 원인을 추적하고자 한다.
II. 훈민정음 제자원리에 함축된 역학사상
1. 훈민정음의 역학적 배경
훈민정음 창제자들은 언어에 우주론과 형이상학을 최고조로 함축시켰다. 제자해 첫머리에서는 "천지 만물의 이치는 오로지 음양과 오행일 뿐이며, 곤(坤)과 복(復)의 사이에서 태극이 생겨나 움직이고 멈춘 후에 음양이 생긴다"고 천명하며 인간의 소리 또한 이 음양의 이치를 비켜갈 수 없음을 선언했다. 정인지 서문에서도 자연의 소리가 있으면 자연의 글이 있어야 하므로, 삼재의 도리를 글자에 실어 만물의 뜻을 통하게 했다고 기술되어 있다.
이러한 사유는 태극, 음양, 오행, 삼재를 세계의 근원적 질서로 바라본 송대 신유학(성리학)의 우주론을 계승한 것이다. 특히 소옹(소강절)이 그의 저서 『황극경세서』에서 "성음(聲音)의 수를 안 이후에야 만물의 수를 볼 수 있고 이치를 알 수 있다"고 하여 인간의 소리를 양(天)과 음(地)의 철학적 체계로 파악한 맥락과 정확히 일치한다.
주역의 체계에서 우주는 태극에서 양의, 사상, 팔괘로 분화되는 음양의 이분법을 따르면서도, 삼변(三變)을 통해 팔괘를 완성하여 천지인 삼재를 이룬다. 북송의 주돈이는 『태극도설』을 통해 '무극이면서 태극'인 우주의 본체가 동(動)하여 양을 낳고 정(靜)하여 음을 낳으며, 이 두 기운이 화합해 오행을 이루고 만물을 생성한다는 우주 생성론을 체계화했다.
훈민정음 해례본에 자주 등장하는 '천지의 이치', '도(道)', '리(理)' 등의 개념은 이처럼 만물의 본원인 리(理)가 만물 속에 흩어져 존재하며 결국 하나로 귀결된다는 성리학적 세계관의 표상이다. 창제자들은 문자의 이치와 소리의 이치가 자연의 질서와 동일하므로, 소리에 담긴 본연의 이치를 밝혀 문자에 그대로 반영하고자 했다.
2. 훈민정음 자음의 제자원리와 역학적 의미
자음(초성)은 기본자 5자(ㄱ, ㄴ, ㅁ, ㅅ, ㅇ)와 이체자 3자(ㆁ, ㄹ, ㅿ)를 발음기관의 모양 및 소리 내는 작용을 본떠 만들었으며, 나머지 글자들은 소리가 거세지는 정도에 따라 획을 더하는 가획(加劃)의 원리로 창제되었다. 자음의 기본자 상형 원리와 오행 배속은 발음기관의 생태적 특징과 결합되어 정밀하게 조직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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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금닛소리(아음, ㄱ): 혀뿌리가 목구멍을 막는 모양을 본떴다. 오행상으로는 어긋나고 길게 자라는 '나무(木)'에 해당하며, 계절로는 봄, 오음으로는 각(角), 방위로는 동쪽이다. 소리의 특징은 목구멍소리와 비슷하면서도 야무지고 실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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혓소리(설음, ㄴ): 혀가 윗잇몸에 닿는 모양을 본떴다. 오행상으로는 재빠르게 움직이고 날카로운 '불(火)'에 해당하며, 계절로는 여름, 오음으로는 치(徵), 방위로는 남쪽이다. 소리가 구르고 날리는 특성을 지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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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술소리(순음, ㅁ): 입의 모양을 본떴다. 오행상으로는 모나고 합해지며 만물을 머금는 '흙(土)'에 해당하며, 계절로는 늦여름(환절기), 오음으로는 궁(宮), 방위로는 중앙(일정한 위치 없음)이다. 소리가 넓고 머금는 특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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잇소리(치음, ㅅ): 이의 모양을 본떴다. 오행상으로는 단단하고 물건을 자르는 '쇠(金)'에 해당하며, 계절로는 가을, 오음으로는 상(商), 방위로는 서쪽이다. 소리가 부스러지고 걸리는 특성을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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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구멍소리(후음, ㅇ): 목구멍의 둥근 모양을 본떴다. 오행상으로는 깊고 윤택한 '물(水)'에 해당하며, 계절로는 겨울, 오음으로는 우(羽), 방위로는 북쪽이다. 소리가 비어 있고 유통되어 맑게 통한다.
기본자 중에서 'ㄴ, ㅁ, ㅇ'은 소리가 가장 거세지 않은 불청불탁(不淸不濁)의 소리이지만 상형의 시초로 삼았고, 'ㄱ, ㅅ'은 전청(全淸)의 소리임에도 형태적 특징을 고려해 기본자로 삼았다. 이체자인 'ㆁ, ㄹ, ㅿ'은 각각 목구멍, 혀, 이의 형태를 본떠 'ㅇ, ㄴ, ㅅ'의 체(體)를 변형했으나 소리가 세어져서 가획한 것은 아니다.
특히 'ㆁ'은 오행상 나무(木)인 어금닛소리에 속하지만, 물(水)인 목구멍소리 'ㅇ'의 형태를 모방한 이유를 "나무의 움이 물에서 나와 부드러운 상태라 아직 물 기운이 많은 것과 같다"는 역학적 비유로 설명한다. 이처럼 자음의 배열과 원리에는 오행의 상생(木→火→土→金→水) 순서와 방위, 음성적 자질이 시각적으로 조화를 이루고 있다.
3. 훈민정음 모음의 제자원리와 역학적 의미
모음(중성)은 우주의 근간인 천지인 삼재(三才)를 상형하여 기본 3자(ㆍ ㅡ ㅣ)를 창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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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ㆍ'(천, 天): 하늘의 둥근 모양을 본떴으며, 양(陽)에 속한다. 하늘이 자(子)방향에서 열리는 천개(天開)를 의미하며, 입속 가장 깊은 곳에서 발음되는 후설모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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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ㅡ'(지, 地): 땅의 평평한 모양을 본떴으며, 음(陰)에 속한다. 땅이 축(丑)방향에서 열리는 지벽(地闢)을 의미하며, 음성학적으로 설근이 중간인 중설모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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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ㅣ'(인, 人): 사람이 서 있는 모양을 본떴으며, 음과 양을 겸비하고 있다. 사람이 인(寅)방향에서 생겨나는 인생(人生)을 의미하며, 음성학적으로 설근이 얕은 전설모음이다.
모음의 확장인 초출자(ㅗ, ㅏ, ㅜ, ㅓ)와 재출자(ㅛ, ㅑ, ㅠ, ㅕ)의 형성 과정은 주역의 사상(四象)과 팔괘(八卦)의 분화 과정에 대응된다. 초출자는 하늘과 땅의 첫 사ꐔ에서 비롯되었으며, 재출자는 사람(ㅣ)의 기운을 겸하여 거듭 생겨난 소리이다. 이 여덟 글자에 모두 'ㆍ'가 관통되어 있는 것은 "양이 음을 거느리고 만물에 두루 흐르는 이치"를 시각화한 것이다.
모음 11자는 주역 계사전의 하도(河圖) 수리에 따라 생수(生數, 1~5)와 성수(成數, 6~10)로 배속된다. 'ㅗ'는 천수 1로 물을 낳는 자리(天一生水), 'ㅜ'는 지수 2로 불을 낳는 자리(地二生火), 'ㅏ'는 천수 3으로 나무를 낳는 자리(天三生木), 'ㅓ'는 지수 4로 쇠를 낳는 자리(地四生金)이다. 또한 'ㆍ'는 천수 5로 흙을 낳는 자리이며, 'ㅡ'는 지수 10으로 흙을 이루는 수이다.
오직 'ㅣ'만이 고정된 수와 자리가 없는데, 이는 인간이 무극의 참됨과 음양오행의 정수가 미묘하게 어울려 엉긴 존재이므로 고정된 수리로 논할 수 없기 때문이다. 이성구의 연구에 따르면 모음을 하도에 맞추어 배열할 때 'ㅣ'는 무위수(無位數)로서 고정되지 않는 성질을 지닌다.
4. 훈민정음 합자의 역학적 의미
초성, 중성, 종성이 결합하여 하나의 완성된 글자(음절)를 이루는 구조 역시 삼재의 동정(動靜) 논리로 설명된다. 초성은 소리를 발동시키는 하늘의 일(天, 動)이고, 종성은 소리를 그치고 완성하는 땅의 일(地, 靜)이며, 중성은 초성의 발생을 이어받아 종성의 성취로 연결하는 사람의 일(人, 兼互動靜)이다. 즉, 글자의 중심축은 중성(모음)에 있으며, 이는 천지가 만물을 생육하되 이를 보필하고 재단하는 것은 인간의 주체적 힘에 기인한다는 인문주의적 철학의 반영이다.
종성이 따로 새로운 글자를 만들지 않고 초성을 다시 사용하는 '초성부수종성(初聲復爲終聲)'의 원리 또한 우주의 순환론으로 해석된다. 태초의 원기가 사계절을 순환하여 겨울(貞)이 지나면 다시 봄(元)이 오듯이, 종성이 다시 초성이 되고 초성이 종성이 되는 원리는 막힘없이 순환하는 우주의 영원성을 담고 있다.
또한 사성(성조)의 배치는 만물의 생장수장(生長收藏) 과정에 비유된다. 편안하고 부드러운 '평성'은 봄에 만물이 피어나는 상이며, 부드럽고 높아지는 '상성'은 여름에 만물이 무성해지는 상이다. 높고 씩씩한 '거성'은 가을에 만물이 무르익는 상이고, 빠르고 막히는 '입성'은 겨울에 만물이 숨고 감추어지는 상에 해당하여 성조의 고저장단마저도 역학적 질서에 정밀하게 순응시켰다.
III. 자음에서 순음과 후음의 오행 분별
중국 음운학의 전통(『광운』, 『홍무정운』 등)에 영향을 받은 훈민정음은 초성을 아·설·순·치·후의 오음으로 분류하였다. 송대 사마광의 『절운지장도』에서도 오음을 목·화·토·금·수의 오행 상생 순서와 사계절에 배속시킨 바 있으며, 이는 훈민정음의 오행 배속과 원리적으로 유기적인 일치를 보인다.
그러나 조선 후기의 신경준이 저술한 『훈민정음운해』를 비롯하여 『동국정운』, 『홍무정운역훈』, 『사성통해』, 『악학궤범』 등의 문헌에서는 순음과 후음의 오행 배속이 훈민정음 해례본과 정반대로 뒤바뀌어 나타나는 혼란이 존재한다. 해례본에서는 순음(ㅁ, ㅂ, ㅍ)이 궁성(土)이고 후음(ㅇ, ㆆ, ㅎ)이 우성(水)인 반면, 『훈민정음운해』 등에서는 순음이 우성(水)이고 후음이 궁성(土)으로 분류되어 있다.
이러한 전도 현상이 발생한 결정적인 이유는 신경준이 『훈민정음운해』를 저술할 당시에 원본인 '훈민정음 해례본'을 직접 보지 못했기 때문이다. 최현배의 『고친 한글갈』에서도 지적하듯이, 신경준은 정인지의 서문만 보았을 뿐 해례본의 구체적인 제자해 내용을 보지 못해 자신의 철학적 추론에 의존해 태극설을 결합시켰고, 자형 발생설에서도 해례본과 다른 오류를 범했다.
중국 음악 이론에서 오성(궁·상·각·치·우)은 현의 굵기에 따라 음의 고저청탁이 결정되는데, 가장 굵은 현에서 나는 길고 낮은 탁음이 궁(土)이고 가장 가는 현에서 나는 짧고 높은 청음이 우(水)이다. 훈민정음 창제자들은 소리의 직관적·철학적 성질을 연결했다. 입술소리(ㅁ, ㅂ, ㅍ)는 입술이 모나고 합해지며 땅처럼 든든하고 머금는 광대한 소리이므로 궁성(土)에 배속하는 것이 자연스럽다. 실제로 입술소리의 기본자인 'ㅁ'은 땅이 사방으로 펼쳐진 지방(地方)의 형상과 통하며 한자의 입 구(口) 모양과도 부합하여 글자 모양으로도 土의 상징성을 증명한다.
반면 목구멍소리(ㅇ, ㆆ, ㅎ) 중에서 'ㅇ'은 본래 음가가 없는 '무(無, zero)의 소리'이지만 창제자들은 이를 수학의 '0'처럼 존재적 가치로 인식했다. 하도 수리에서 만물은 오행상 물(水)로부터 비롯되며, 水는 만물의 본원이자 첫째 기운이다. 따라서 소릿값이 없어 만물의 근원적 바탕을 이루는 목구멍소리 'ㅇ'을 오행의 시작인 水(우성)에 배정한 것은 철학적으로 매우 정밀한 설계이다. 그러므로 해례본의 원본 논거를 무시하고 신경준의 추론에 기반해 오행 분류에 이론을 제기하는 것은 한글 창제의 본래 뜻을 왜곡하는 불합당한 일이다.
IV. 맺음말
훈민정음 창제의 철학적 지평을 연 것은 『주역』과 『성리대전』이며, 학문적으로는 중국의 성운학과 송대 신유학의 우주론적 세계관이 깊이 투영되어 있다. 인간의 소리를 우주의 거대한 운행 질서인 태극, 음양, 오행, 삼재의 변치 않는 법칙 속에서 이해하고자 했던 우리 선조들의 고도화된 사유의 결정체가 바로 오늘날의 한글이다.
한글은 인간의 발음기관과 고도의 음성학적 자질을 정확히 관찰하여 시각화한 진보된 문자 체계이면서도, 동시에 동양의 형이상학적 우주론을 자형과 운용 원리에 완전하게 내포하고 있는 전 세계 유일의 '철학적 자질문자'이다. 순음과 후음의 오행 분류를 둘러싼 조선 후기 운서들의 혼란은 원본 해례본의 미확인에서 비롯된 일시적 왜곡일 뿐이며, 해례본에 담긴 본연의 제자 이치를 바로잡음으로써 한글의 완전성을 재확인할 수 있다.
인간 사회에서 철학적 사유를 전개하는 최고의 수단이 언어와 문자라는 점을 상기할 때, 독창적인 역학 사상을 담아 만든 글자를 소유하고 있다는 사실은 우리 민족이 고유하고 주체적인 '철학 공동체'의 확고한 기반을 이루었음을 증명하는 가장 위대한 문화적 유산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