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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주와 과학의 관계, 사주명리는 비과학인가?
2025.06.09 16:52
작성자 : 김만태교수    메일 : ware4u@hanmail.net 조회 : 3,728  

사주와 과학의 관계, 사주명리는 비과학인가?

본 내용의 원문은 김만태 교수님의 KCI 학술논문,「사주와 운명론, 그리고 과학의 관계」(원불교사상과 종교문화 제55집, 2013년 3월)에 수록되어 있습니다.

사주와 과학의 관계, 사주명리는 비과학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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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주명리와 과학의 관계

인간은 자연과 세계를 이해하려고 노력하는 가운데 여러 가지 연구 방법을 추구해 왔다. 고전 물리학의 기계론적 세계관은 우리가 일상생활에서 부딪히는 물리적 현상 같은 것의 묘사에는 유용하다. ‘유기적’이라는 말로 요약될 수 있는 동양사상가들의 견해는 우주의 모든 현상을 불가분하고 조화된 전체의 불가결한 부분들로서 간주하기 때문에 기계론적 세계 인식에 반대된다.

유기적 견해는 기계론적인 것보다 더욱 근원적이며, 양자론의 현대 물리학과 동양의 직관주의 세계관은 서로 유사하다. 과학과 동양사상은 각각 추론적인 것과 직관적인 것의 두 능력을 함께 지닌 인간 정신의 상보적(相補的) 표현이라고 오스트리아의 물리학자 프리초프 카프라(Fritjof Capra)는 말하였다. 직관주의적 경험은 사물의 가장 깊은 본성을 이해하는 데 불가결하고, 과학은 현대 생활에 중요한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가 필요로 하는 것은 이 둘의 단순 종합이 아니라 동양사상적 직관과 과학적 분석 사이의 역동적 상호작용이다.

물질에 대한 새로운 이해는 이제 더 이상 과학적 진리를 절대적 위치에 둘 수 없게 하였다. 과학은 각 시대가 세계를 이해한 방법의 단면을 보여주는 거울인 셈이다. 구한말 당시 조선보다 근대 서양이 문명화되었다고 말할 수는 있지만 조선 문화보다 서양 문화가 더 훌륭하다고 말할 수는 없다. 왜냐하면 문명이 기술적 측면을 갖는 것과 달리 문화는 인간적 속성을 포함하기 때문이다. 문화를 형성하는 요소는 수없이 많으며 다양한 문화가 존재한다. 사주명리도 그 중 하나이다.

현대사회의 정보화, 과학화가 심화, 급속화될수록 사주명리와 같은 전통적인 운명 예측행위에 기대하려는 경향은 감소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더욱 증가하고 있다. 이런 모순된 듯한 경향을 아이러니하다고까지 말하는 경우가 많은데 실제로는 지극히 당연한 사실일 뿐이다. 왜냐하면 정보화, 과학화의 가속으로 현대사회에 각종 다양한 정보와 지식이 넘쳐날수록 오히려 현대인들은 이 세상에서 유일무이한 존재인 자신의 정체성을 확인할 수 있는 정보의 부재 현상에 직면하고 있다. 사회적 안전망이 미흡한 가운데 최근 ‘자살공화국’ 한국사회의 높은 자살률도 이런 아노미(Anomie) 현상과 결코 무관하지 않다.

개인적, 사회적 정체성의 혼란 속에서 사주명리처럼 비합리적으로 보이는 현상(종교 현상과 유사)도 나름의 정합된 논리와 체계를 갖추고 연구된다면 인간의 근본 행동과 심리를 이해하는 데 유용할 수 있다. 또한 “인생은 타고난 사주팔자가 아니라 순간마다 사건마다 자기 선택, 노력, 의지에 따라 그 인생이 결정된다.”라는 자기 과신에 찬 주장도 사주팔자 또는 초월적인 힘과 존재에 의해 운명이 전적으로 결정된다는 주장과 결국 다르지 않은 맹신이다. 이 또한 인간에 대한 이해를 편협하게 만드는 부작용을 낳는다.

과학과 종교의 중간적인 철학도 각 시대가 직면한 진리 탐구의 창구 역할을 한다. 과학과 종교, 철학 모두 인간 삶의 근원에 대해 질문한다는 공통점에서 기본적으로 상호 관련성을 맺고 있다. 마찬가지로 사주명리도 음양오행의 순환적 관점에서 우주 자연의 질서를 이해하고 생로병사라는 인간의 근본적 고뇌를 해결하고 인간 삶에 대해 회의를 하는 과정에서 형성된 것이란 점을 고려할 때 ‘과학―철학―종교’의 범주와 상당한 연관이 있다. 사주명리가 지닌 논리성, 체계성, 학문성, 추론성 등을 종합해볼 때 철학의 범위에 보다 근접하다고 할 수 있다. 이 외에도 사주명리는 강력한 술수성(術數性)과 신앙성, 일정한 실증성(實證性)도 함께 갖고 있다.

철학은 다름이 아니라 끊임없이 삶의 문제와 씨름하며 그것을 어떻게 하면 잘 풀어나갈까 고민하는 사람들의 물음과 그에 대한 대답들이다. 이렇게 물음을 던질 수 있는 존재를 ‘철학적 존재’라고 하며, 철학적 문제들 중 가장 중요한 것은 바로 “나는 누구이고 무엇인가?”라는 물음이다. 일반 대중들은 어떤 방식으로건 철학을 필요로 하는데 제도권의 철학이 대중들의 철학적 물음에 제대로 대답을 못해주고 있다. 그래서 그들은 자신의 철학적 욕구를 거리의 ‘철학관’에서 채우고 있다.

과학적 예측의 소박한 형태 내지 초월적 형태가 바로 점(占)이다. 어떤 면에서 미아리의 점복자나 카이스트의 과학자나 추구하는 것은 같다. 우주에 어떤 법칙성이 있다고 전제하고, 그 법칙을 알아내어 미래를 예측하고자 하는 것이다. 다만 그 방법이 서로 다를 뿐이다.

인간은 그저 시간이 흘러가는 대로 맹목적으로 현재의 삶을 살아가는 존재가 아니라 끊임없이 과거를 되돌아보고 미래를 내다보며 세상사와 인생의 궁극적 근원과 그 운명에 대해 심각하게 질문을 던지며 고민하는 존재이다. 본질적으로 인간의 의식작용은 막연히 미래를 기다리기보다는 적극적으로 미래를 예지하고자 한다. 나아가 자신에게 닥쳐올 미래를 가능한 한 긍정적인 모습으로 실현하고자 노력한다. 다른 동물과 달리 인류가 지구상에 존재한 이래 ‘점치는 인간’인 ‘호모 아우구란스’(homo augurans)로 한결같이 존재해 오는 까닭도 바로 이 때문이다.

인간에게 운명 인식이 처음으로 싹트는 경우는 인력으로 감당하기 힘든 일을 맞닥뜨렸을 때이다. 그 순간 인간은 불가항력에 그저 굴복하는 것이 아니라 어떻게든 난관을 극복하려고 지혜를 발휘한다. 그 일환으로 운명에 내재하는 초자연적 존재의 뜻을 예지하기 위해 다양한 점복이 행해진다. 사주명리도 그중 하나이다. 사주명리는 사람이 자신의 장점과 한계를 깨달아 자신의 길을 보다 온전하게 갈 수 있도록 인도하며, 삶의 역경이 도저히 피할 수 없는 고통이라면 이를 감내하고 보다 나은 내일을 기다릴 수 있도록 해주는 삶의 버팀목이 된다. 따라서 사주명리는 ‘위안과 한계의 미학’으로서 가치를 지닌다. 그러므로 운명론적 신앙과 사주명리를 미신으로 치부하여 해체하거나, 통계과학이라며 사주명리의 정체성을 혼란시키며 무조건 옹호하기 보다는 오히려 보편적 인간 문화의 특성을 이해하는 계기로 삼는 게 보다 현명하고 생산적이다.

불확정성원리는 현실의 인간세계에도 적용될 수 있다. 사주(팔자)가 삶의 길흉화복의 향방에 중요한 영향을 미치긴 하지만 유일한 요인은 결코 아니다. 시대상황이 복잡해질수록 인생의 성패를 좌우하는 요인들도 점차 많아지고, 그로 인해 우연성과 불확실성도 점층 높아진다. 그런즉 현 시점에서 미래 운명에 대해 정확한 예측을 한다는 것도 점점 어려워진다. 그러나 인생의 향방과 성패가 사주(팔자)에 중요한 영향을 받는다는 점을 수용하고서, 이후 삶의 궤적(전공, 직업, 배우자 등)에 대한 정보를 추가한다면 엄밀하게 정확한 예측은 불가능할지라도 확률적으로 상당한 가능성은 충분히 제시할 수 있다.

사주명리의 운명함수에서처럼 어느 곳에서 어떤 사주를 갖고 태어나느냐, 동일한 사주라도 어떤 부모에게서 태어나느냐, 동일 사주 동일 부모일지라도 어떤 공부, 전공을 하고 어느 대학을 진학하느냐, 어떤 배우자와 동료를 만나느냐 등 거의 동등한 조건으로 인생을 출발한 두 사람이 미묘한 초기조건의 차이 때문에 그 후의 인생행로가 각자의 의지와 상관없이 크게 달라지는 경우를 우리는 많이 보아왔다. 하지만 그런 비선형적이며 무작위적인 모습 가운데도 일정한 질서가 존재하고 있다. 그래서 ‘나비효과’의 창시자인 로렌츠(Edward N. Lorenz)는 카오스적이라 생각되는 현상에는 인생행로의 다양한 부침과 같은 현상도 포함된다고 말하였다.

프랙탈(Fractal)은 카오스(Chaos)에 내재한 질서 구조이자 그것을 묘사할 수 있는 언어라고 할 수 있다. 카오스가 복잡하면서도 그 속에 하나의 질서를 지니는 것은 프랙탈이 있기 때문이다. 사주, 사주팔자를 다루는 사주명리가 바로 카오스와 같은 인생 행로에서 프랙탈과 같은 길잡이 역할을 한다고 논자(김만태)는 생각한다. 그래서 지금까지 사주명리를 계속해서 연구 강의 상담해오고 있다.

지금도 과학은 눈부신 발전을 이루고 이를 기반으로 한 기술은 우리의 삶을 바꿔 놓고 있지만 과학 방법론 자체에는 근본 한계가 있다. 이 한계 밖에도 중요한 분야가 많은데 형이상학이 그중 하나이다. 즉 과학의 너머에는 과학 실험으로 관찰할 수 없는 형이상학적 문제들이 버티고 있다. 예를 들면 중력이 왜 존재하는지는 과학으로도 알지 못한다. 인간이 할 수 있는 일은 단지 중력의 작용을 관찰하고 이를 더욱 정확히 설명하는 것뿐이다. 사주명리와 운명론은 인간의 존재성과 관련된 형이상학적 영역에 속하는 명제이다.

그리고 운명론적 신앙과 운명개척 의지는 ‘상호 모순’ 관계가 아니라 ‘상보(相補)’ 관계에 놓여 있다. 즉 인간의 운명은 선천적 요인(운명아: 운명 속의 나)이나 자유의지(의지아: 의지 속의 나)에 따른 필연적 결정이 아니라 씨줄이라는 운명아(運命我)와 날줄이라는 의지아(意志我)의 상보(相補) 작용에 의해 확률적, 가능적, 개연적 결정으로 만들어지는 것이다.

지금까지 살펴본 바처럼 사주명리가 과학이냐 아니냐의 논의는 운명론적 신앙과 운명개척 의지 간의 논쟁처럼 쉽게 합일된 결론에 이를 수 없다. 왜냐하면 각 관점이 위치하는 차원이 다르기 때문이다. 인간의 운명과 이를 추론하는 사주명리는 기존의 근대 과학-미신의 잣대로 가늠할 수 있는 절대적, 계량적인 것이 아니라 가능성을 제시하는 상대적, 확률적인 것이다.

동양 철학에서는 어떤 것이 존재하려면 반드시 그것의 대상 짝도 전제되어야 함을 강조한다. 이를 대대율(待對律)이라 정의한다. 그래서 음(陰)과 양(陽)이 상반(相反)되지만 모순, 대립으로 떨어지지 않고 서로 끝없는 상성(相成) 작용을 하면서[變易] 하나의 ‘온 덩어리’[整體]를 이루는 이치를 일컬어 도(道)라 하는 것(一陰一陽之謂道)이다. 즉 음은 양을 전제로 성립하고 양은 음을 전제로 성립하며, 음이 양이 되고 양이 음이 되는 것이다. 이런 음과 양은 결코 독립, 자존, 고정, 불변의 존재가 아니다. 이 명제는 해와 달이 서로 계속 뜨고 지면서 만물을 잉태하고 양육하는 자연 섭리의 또 다른 표현일 뿐이다.

운명아와 의지아의 관계, 이와 연장선상에 있는 사주명리와 과학의 관계도 하나가 다른 하나를 배척하는 대립, 모순이 아니라 상반되지만 서로를 전제로 하여 존재, 상성하는 상보(相補), 대대(待對)의 관계로 보는 것이 가장 합당하다. 비유하자면 사람들은 흔히 햇빛이 비치는 밝은 면만 있어도 세상을 잘 볼 수 있으리라고 착각하기 쉬운데, 어두운 그림자가 함께 있어야만 세상을 실제 그대로 분명하게 볼 수 있다는 사실을 망각해서는 안 되는, 서양의 흑백이 아니라 동양의 음양, 태극(太極)과 같은 이치이다. 따라서 사주명리는 운명종속이냐 자유의지냐, 미신이냐 과학이냐의 이분법적 논리로 접근할 수 있는 것이 아니며, 삶의 불확정성 앞에서 주저앉지 않고 행복한 삶을 추구하고자 하는 적극적인 의지 발현의 한 모습이라고 말할 수 있다.


맺음말

자신의 미래와 운명을 자신의 의지와 노력으로 만들어 갈 수 있다는 인식은 사회 규범적으로 바람직하게 받아들여진다. 그러나 한국인은 관념적으로는 자유의지론을 선호하지만 정작 실천적으로는 운명결정론에 치우치는 경향이 크다. 이는 개인차에 기인하는 바도 있겠지만 그동안 한국사회 운영의 원칙과 일관성, 공정성 부재가 빚어낸 현상이기도 하다. 한국인에게 있어 사주내지 사주팔자는 수긍하고 살아가야만 하는 운명의 틀이자 극복하고 개척해나가야 할 양가감정적(兩價感情的) 존재이다. 한국인에게 있어 사주팔자는 인생의 어느 순간에 한번쯤 심각하게 생각해보게 되는 그 무엇이다.

근본적으로 인간 삶의 조건은 불완전하다. 이런 세상 속에서 인간은 자신의 운명에 대해 고뇌하며 운명 인식을 싹 틔운다. 사주(팔자)는 한국인의 삶 속에 깊숙이 자리하고 있으며 한국인의 운명관에 미치는 영향이 지대하다. 이처럼 사주명리가 오랫동안 한국인의 가치관과 운명 인식에 큰 영향을 미치는 관념 체계로 존재해 왔음에도 불구하고 지금까지 사주명리는 학문적, 공식적으로 제대로 된 담론이 없이 주변문화에 머물러 왔다.

지금까지 한국사회에서 사주와 운명에 관한 담론은 ‘운명-의지’와 ‘미신-과학’의 측면에서 진행되어 왔다. 운명 담론을 논리적으로 분석해보면, 인생은 운명결정론이나 자유의지론, 어느 한쪽에만 전적으로 매이는 것이 결코 아님을 알 수 있다. 인간의 운명은 운명결정론이나 자유의지론에서처럼 필연적인 게 아니라 운명(운명아)과 의지(의지아)의 상호작용에 따른 개연적인 것이다. 운명에 관한 담론을 이렇게 이해하는 것이 보다 인간적, 현실적이며 설득력이 있다.

물질에 대한 새로운 이해는 이제 더 이상 과학적 진리를 절대적 위치에 둘 수 없게 하였다. 따라서 현대 과학에서는 우연, 모호, 개연 등의 요소도 과학적 영역 안으로 수용한다. 인생은 피사의 사탑에서 같은 궤적을 그리며 떨어지는 쇠구슬이 결코 아니다. 아무리 사주명리 운명함수의 제반 조건이 같을지라도 시간과 공간이란 두 축 안에서 인간이란 유기적 존재가 만나서 그려내는 인생의 궤적은 결코 동일할 수가 없다. 그렇기 때문에 사주명리학을 근대 서양과학의 범주에서 설명하겠다는 것은 종교와 예술을 자연과학으로 증명하겠다는 것만큼이나 어리석은 일이라고 생각한다.

인간 운명에 대한 믿음과 극복하려는 의지를 통한 운명애(運命愛)는 사주명리학을 특징짓는 가장 큰 표상이다. 그러므로 비록 술수적인 면이 있긴 하지만 “나는 어떤 존재이며 앞으로 어떻게 살아가면 좋겠는가?”라는 물음의 대답에서 시작한 사주명리를 ‘운명결정이냐 자유의지냐’, ‘미신이냐 과학이냐’의 단순 이분(二分) 논리로 접근하기 보다는 종교 및 철학과 일맥상통하는 부분이 있는, 불완전한 인간 삶에 대한 또 다른 의지의 표현으로 여기는 것이 동물이 아닌 인간으로서의 사람에 대한 이해를 보다 풍부하게 해줄 수 있다고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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